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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ject(탈출)’라고 빠르게 세 번 외치면 그땐 이 레버를 당겨야 합니다. 딱 한 번만 말할 겁니다. 명심하세요!” 스위스 공군 출신의 스테판 웨버가 비행기의 마지막 체크를 마치며 내게 말했다. 우린 비행기에 앞뒤로 앉아 있지만 마이크가 연결된 헤드셋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헤드셋을 통해 듣는 그의 말에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주파수를 잘못 맞춰 잡음이 들어간 미군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가 빠르게 영어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군인답게 무뚝뚝했다. 그가 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내가 잘 알아들은 건가?’ ‘Eject! 그러니까 탈출하라고?’ 곰곰이 내용을 되내인 뒤 내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 되물으려는데 다시 무전이 날아왔다. 지지직거리는 헤드셋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지지직) 그땐 나한테 아무것도 되묻지 마세요. 그래 봐야 빈 조종석하고 얘기하고 있을 테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사고를 대비해 비상 탈출을 설명하는 건가?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땅을 울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이에도 헤드셋에서는 뚝뚝 끊어지는 무전이 뒤섞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비행장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모든 비행기가 같은 주파수를 사용한다. 여기저기서 단호한 말투의 무전이 오갔다. 긴장 때문인지 스테판 웨버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얘기하는 건지,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불안감을 느끼며 진동에 몸을 맡겼다. 전날 오리스의 비행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오리스 직원 모두가 친절했다. 다들 비행에 대한 애정으로 들떠 있었고 중요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대해 만족감이 넘쳤다. 호텔 침대에는 “오리스 엠브리 체험 비행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카드와 비행 조종사가 입는 점프슈트가 놓여 있었다. 응당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기자들이 한껏 고무된 것은 당연한 얘기다. 오리스의 환대와 비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런 충격을 줄 줄이야.... 오리스는 그간 스위스 헌터 팀과 P3 곡예 비행 팀 같은 전직 스위스 공군 파일럿의 모임, 스위스 에어 레이싱 팀과 스폰서십을 다져왔다. 스위스 헌터 팀은 냉전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가장 사랑받는 전투기로 꼽히는 호커 헌터를 보유한 비행 팀이다. 1950년대 영국에서 제작한 헌터는 수십 년간 듬직하게 하늘을 지키다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로 판매된 F-5E 모델이다.

내 머리에 헤드셋이 잘 채워졌나 확인하는 동안 비행기 뚜껑이 닫혔다. 뒤에서 앞으로 슬라이딩되며 투명한 뚜껑으로 뒤덮인 조종석은 매우 좁게 느껴졌다. 눈앞에 정신없이 펼쳐진 많은 버튼과 레버, 상태를 보여주는 표시 창이 불안과 답답함을 더했다. 다리 사이에 곧게 뻗은 조종간이 요동치자 불안이 커졌다.
“우선 아무것도 손대지 마세요.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까진!” 또다시 헤드셋을 통해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이 궁금해 뭔가 만져보려던 마음은 싹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는사이 비행기가 천천히 2킬로미터에 달하는 활주로를 향해 나아갔다. 그때 다시 무전이 들렸다. “이륙 준비를 완료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심한 떨림과 함께 헤드셋을 넘어 귀로 파고드는 굉음을 느꼈다. 엠브리 비행장은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비행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가파른 알프스 봉우리와 좁은 계곡, 활주로와 나란히 깔린 철도, 굽이치는 유명한 고타드 패스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등이 험준한 산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지켜보면 이곳은 비행기와 철도, 자동차 등 모든 이동 수단이 모여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스위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운 이곳에 엠브리 군용 전초 기지를 구축했다. 지금은 이렇게 스위스 시계인 오리스에 완벽한 비행 장소를 제공하지만 원래는 군용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다. 주변은 터널,벙커등을쉽게만들수있는험준한 지형이며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숨을 수 있는 협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엠브리 비행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차례다. 마음이 설레었다. 이륙 준비를 완료했다는 무전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잠잠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헌터가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어떻게 된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이 앞에 앉은 조종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불렀다. 은퇴한 스위스 공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어 보였다. 그의 입이 움직였고 소리는 내 헤드셋을 통해 들렸다. 자신을 P3 곡예 비행단이라 소개했다. ‘이제부턴 우리 차례’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들은 무전은 헌터의 무전이었다. 내가 탄 비행기는 P3 곡예 비행단의 필라투스 PC7이었다. 필라투스 PC7은 헌터보다는 조금 순하게 생긴 2인용 훈련기다. 만감이 교차했다. 혹시나 비상 탈출을 해야 하면 어쩌나 하고 철렁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동시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활주로를 넘어 날아오른 PC7은 날렵하고 민첩했다. 훈련기인 만큼 기본에 충실했고 곡예기인 만큼 반응이 빨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엠브리는 알려진 것처럼 험준했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산맥과 산맥 사이를 날다 보니 호수가 펼쳐졌다. 앳된 얼굴의 조종사는 내게 조종간을 넘기고 헤드셋을 통해 방향을 지시했다. “3시 방향으로 조종간을 90도 틀어보세요.” 혼자 조종간을 잡자 긴장되고 당황스러웠다. ‘3시 방향이 어디더라?’ 그때 왼쪽 손목에 찬 오리스의 프로파일럿 칼리버 111이 떠올랐다. 잽싸게 손을 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커다란 인덱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고 하늘을 날며 파일럿 시계를 바라보다니.... 남자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30분간 진짜 파일럿으로서의 첫 비행을 마쳤다. 비록 헌터는 아니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경험. 땅에서도 한동안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엠브리 비행장은 그야말로 비행 축제의 장인 동시에 남자의 로망을 실현하는 곳이었다. 비행은 하루 종일 맑은 날씨에서 이뤄졌다. 오리스의 자랑이 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연신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에 찬 파일럿 워치를 바라볼 때마다 스위스 엠브리의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도 여전히 오리스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111은 하늘을 나는 로망과 맞닿아 있다.
글.사진 / 최태형
오리스-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1

프로파일럿 칼리버 111은 10일이라는 놀라운 파워리저브의 핸드와인딩 시계다. 스위스에서도 오너가 직접 운영하는 독립 시계 브랜드인 오리스가 설립 110주년을 기념해 직접 만든 칼리버 110을 잇는 모델이다. 10일의 파워리저브는 3시 방향에 위치한 오리스 특허 비선형 표시계에 나타난다. 9시 방향에는 스몰 세컨드와 날짜 표시 창이 있다. 칼리버 110과 뚜렷하게 비교되는 부분은 이 날짜를 표시하는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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